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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늑대의 보름달

16. 해바라기는 그렇게 정했다

mady 2019. 7. 15. 22:01

그 날 과일 가게 안 분위기는 완전 어수선했다. 가연은 지성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지성은 가연과 친해지고 싶어 애를 썼다. 

 

"가연 씨!"

 

"가연 씨?"

 

"가연 씨~"

 

내내 지성에게 불리는 가연의 이름에 가연은 지성의 미모에 몰려온 소녀들의 눈총을 받아야했다. 가연은 그런 눈초리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억울하고, 피식, 비웃어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또 웃기고 지성이 눈에 띄어서 과일을 더 가져온다 핑계를 대고 그의 곁에서 멀어지려 애를 썼다. 물론, 이런 가연의 사치스러운 마음을 지성은 모를리가 없었다. 딱 보니까 부끄럽고, 부담스러워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것 같은데...지성은 가연에게 마음을 정리할 틈도 없이 그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결국, 그 날 저녁, 가연은 폭발해 버렸다.

 

"지성 씨!"

 

"오, 가연 씨 오늘 저 이름 처음 부르신거 알고 계세요?"

 

"아압...아, 말 돌리지 마시고요! 왜 이러시는 거죠?"

 

온 얼굴이 빨개져서 화난 듯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귀여웠다.

 

"일단, 가게 문 이제 닫죠, 손님도 이제 안 오는데."

 

"그게 그렇게 막 정할 일이 아닌데요 지성 씨. 특히나 신입은요."

 

"괜찮아요. 은근 제가 많이 팔았거든요. 그리고 우리 잠깐 쇼핑 하기로 했잖아요. 가연 씨 설마 데이트나, 이런 생각하셔서 저랑 쇼핑 안하고 그냥 가실 거 아니죠?"

 

"뭐뭣!! 제가 언제 그런 생각을 해요!!"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이 터질 듯 화악 솟구치더니, 후우후우, 심호흡을 하며 가라 앉는다. 

 

"지성 씨, 저 계속 놀리실거면 여기서 그만 두세요."

 

사뭇 진지한 가연의 충고에, 지성은 빙그래 웃으며 가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죠? 이건. 하는 가연의 표정에도 내색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미안해요. 이제 안 놀릴게요."

 

그녀의 손을 잡고 화해의 악수. 중얼거리며 일방적인 화해를 하고 그녀의 눈치를 보듯, 갈색 눈망울을 선한 듯 굴렸다. 그런 그의 능글맞음에 가연은 헛웃음을 치며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내리려 애를 썼다. 

 

"그럼 빨리 쇼핑하고 가는 거에요."

 

"당연하죠!"

 

볼이 분홍색으로 물든 채 10대 소년처럼 웃는 그의 모습은 참 순수해보였다. 하지만 그 미소 속 그의 마음은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같이 있고 싶다, 나를 여기에 보낸 왕이 밉다, 지켜주고 싶다, 사랑에 빠지게 한 그녀가 밉다...

눈을 감으면 그녀를 떠올리며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던 왕의 얼굴과 자신을 보고 어쩔 줄 몰라하는 가연의 얼굴이 둥실거렸다. 가연과의 데이트를 떠올리면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아지다가도 왕의 앞에서 모든 것은 월룬왕국 지배자의 뜻대로를 읊는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3초마다 바닥과 하늘을 번갈아가며 롤러코스터를 타는 지성의 속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겉으로는 멍하고 빠릿빠릿한 친절한 과일가게 오빠를 연기하다가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 되니 지성의 속은 점점 더 꼬여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녀와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을 취소하자는 목소리가 머리 안에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지성씨?"

 

"ㄴ, 네예??"

 

이렇게 당황하는 지성은 처음 본터라 가연도 덩달아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 저.. 같이 쇼핑하러 안가요?"

 

"...가야죠. 아침부터 약속했던 건데, 가야죠."

 

큰 결심을 내리는 듯한 그의 말투에 가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 이내 눈꼬리를 휘며 특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크크, 지성 씨 오늘 고민 있구나."

 

무슨 고민인지는 꿈에도 모르고 그녀는 입을 가리며 후후 웃었다. 

 

"지성 씨 이런 모습 처음 봐요. 뭐, 중요한 질문이에요? 말해봐요."

 

"으음...괜찮아요. 다 해결 됐으니까."

 

가연은 조금은 아쉽다는 투로 한숨을 내쉬다가 가게 마감 정리를 마저 했다. 그런 가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자신은 생각보다 가연을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의 웃는 모습에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왕의 여자를 빼앗을 배짱은 없다. 가연이 왜 궁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도 모르는데, 함부로 자신이 궁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리면 그녀는 꽤 큰 충격을 받을 지도 모른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내 여자로 만들 자신은 없지만, 그녀의 웃음을 위해서라면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연씨, 요즘 행복해요?"

 

"어? 갑자기요?"

 

"네..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라서요."

 

"흐음...음..이틀 전만 해도 정말 따분하고, 힘들고, 많이 지친 하루만 계속 됬었던 것 같은데,...요즘은 정말 행복해요."

 

지성의 눈을 똑바로 보며 얼굴을 붉히는 그녀의 행복한 미소가 지성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렇구나...다행이에요."

 

가게 문을 마지막으로 닫고 둘이서 쇼핑을 하러 가는 그림자에서 어쩔 줄 모르는 어색함과 핑크빛 기류가 흘렀다. 가연의 행복한 웃음소리와 뒤에서 그런 가연을 가만히 웃으며 바라보는 지성이 천천히 과일가게에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