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한 미친곳

7. 혼자서 내려버린 결정 본문

소설/늑대의 보름달

7. 혼자서 내려버린 결정

mady 2019. 5. 18. 21:04

"전하!"

 

"전하아아아~!!!"

 

"태~후~마~마~가~~~부르십니다아아아~~~"

 

떠나갈 듯 전하를 한마음가득 담아 부르는 시녀가 있었다. 긴 치마를 꽉 동여매고, 신발은 진흙으로 더러워져서, 머리는 산발이 된, 왕실에는 전혀 맞지 않아보이는 여자였다. 여자는 아까부터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치와 눈길도 무시하고, 온 왕궁을 해집으며 전하를 찾고 있었다.

 

"에흐...천한 것이 어디로 간답니까.."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소리를 질러서..."

 

"여봐! 소리를 지르려면 왕궁 밖에서나 지르거라!"

 

결국 참다 못한 대신 한 명이 노여움을 띄고 그녀에게 다가가는 순간 자홍빛 곤룡포를 입은 젋고 잘생긴 남자가 나무 위에서 툭 튀어나왔다.

 

"아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에 그 대신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땅에 엉덩이를 찧었고, 욕설을 뱉으려다가 곧 자신에게 향하는 목소리에 그대로 땅을 쳐다보는 수 밖에 없었다. 

 

"무얼 보며 호통을 치는 것이냐."

 

"그런게 아니옵고.."

 

아까까지만 해도 호통을 치던 대신이 땅에 납작 엎드려 돼지처럼 진흙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꼴을 보며 흥, 코웃음을 치던 남자가 뒤에서 들리는 거친 숨소리에 움찔했다.

 

"아하하, 들켰네."

 

국어책을 읽는 듯한 말투, 그리고 뻔뻔하게 웃는 얼굴. 잘생긴 얼굴. 길을 걸으면 모두 뒤를 돌아볼 법한 준수하고 색기가 넘치는 얼굴 앞에서도 그 거지꼴인 여자는 숨을 헉헉 내쉬면서도 무표정이었다. 

 

"전하."

 

"화났느냐?"

 

"제가 어찌 화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 여자는 땅에서 기고 있는 대신을 힐끗 쳐다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가게 하시죠. 보는 눈이 많잖습니까."

 

감히 이 나라의 왕에게 천한 시녀가 훈수를 두다니. 감히!

그 광경을 보던 사람들이 입을 떡 벌리고 곧 일어날 일에 두려워했다. 그녀는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모진 매질을 당하여 불구로 살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 시녀의 말에 방실 웃으며 납작 엎드린 대신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 동안 시녀는 낯빛하나 안 바뀌고 가만히 땅만 쳐다볼 뿐이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며 뿔뿔히 흩어졌다. 그 중에서는 재미난 광경을 보지 못해 물러나는 아쉬움의 얼굴을 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안 가면 왕의 눈에 띄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사람들이 주변에서 사라지고 곤룡포를 입은 남자는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다가 작은 속삭임으로 그 여자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꿀이 떨어질 듯한 진득한,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제 앞에 있는 시녀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다정하고 소중하게 불렀다. 

 

"연교야. 놀라지는 않았지?"

 

"...태후마마가 찾으십니다."

 

연교라는 여자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머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당신과는 사적인 대화 하나 나누지 않겠다는 태도에 왕은 아쉬운듯 입술을 깨물었다. 시녀가 그 열정적인 눈빛과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자신은 보잘것 없이 널리고 널린 시녀, 제 앞에 있는 분은 나라를 다스리는, 눈에 담지도 못할 위대하고 높으신 분. 연교는 현명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함부로 높은 나무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늘 알 수 없는 무표정과 남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사는 대쪽같은 여자. 그런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을 왕은 알고 있어 자신의 마음을 직설적으로 내비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만 커져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의 감정은 더욱 더 울렁거리기만 했다. 

 

"그렇구나. 내 곧 가마."

 

자신을 부르는 연교의 목소리만을 위해서 한 시간 가량 도망치던 왕은 1분만의 짧은 대화...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만남을 끝으로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웠던 왕은 다시 한번 대화를 시도했다.

 

"그...많이 힘들었느냐..?"

 

나를 찾느라 목청이 터지도록...종달새같은 고운 목소리까지는 원하지 않았지만 쉰소리가 나도록 부르는 연교의 목에 조금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태후마마의 명령이라면 전 죽을 수도 있사옵니다. 그 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 힘들고 무엇이 두렵습니까."

 

뒤에서 들리는 끽끽거리는 쉰목소리가 왕의 가슴을 아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살짝 희열이 드는 것이, 나를 목이 쉬도록 불러줬다는...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지. 이런게 미쳐간다는 걸까. 결국 연교의 목을 쉬게 만든건 나잖아. 

 

"짐이 많이 미안해서 그러는 건데, 큼흠ㅁ,..흠...혹시 식혜랑 약과 좋아하느냐."

 

여자는 자고로 먹을 것에 약한 법! 게다가 시녀가 식혜랑 약과를 얼마나 먹어봤겠는가. 

 

"죄송하옵니다. 소녀는 소화기능이 약하여 기름진 것을 못 먹습니다."

 

"그럼 식혜만 먹어도 되느리라!"

 

"죄송하옵니다. 소녀는 차가운 것을 먹으면 탈이 쉽게 납니다."

 

"그럼 따뜻한 차는 어떤가??"

 

차. 왕족도 한달에 한번 마실 수 있는 귀하고 귀한. 금보다도 귀한...! 그 이름으로만 듣던 차. 강수를 둔 비장한 얼굴의 왕에게 연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부러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소녀가 어찌 그 귀한 것을 이 천한 입에 대겠습니까. 왕의 호의를 이렇게도 거절하다니. 죽여주시어 이 소녀를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 말 속 뜻은....제발 그만 치근대라는 뜻이었다. 왕은 차라리 죽여달라는 말에 입을 앙다물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둘은 조용히 한시간이 넘도록 기다리는 태후마마에게 돌아갔다. 

 

-

 

"이 나라 주인께서 납십니다~"

 

그리고 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이이이...커다란 문이 열리고 거기에는 번뜩이는 눈빛을 왕에게 쏘는 태후마마가 있었다.

 

"이 나라의 주인을 뵙습니다."

 

"고개 드세요 어머니."

이렇게 예의를 차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어머니가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폐하."

 

"예."

 

"곧.. 우리의 어머니가 내려오신다는 것을 알고는 계시겠죠."

 

"아....그럼요."

 

연교 뒷꽁무니 쫓아다니느라 전혀 생각도 못했던 왕이었다.

 

"우리의 어머니는 이 땅을 친히 굽어살피시는. 그래. 폐하가 이 땅의 어버이라면 그 분은 우리의 어머니이시죠. 그 분이 내려오실 당신의 혼인 상대를 정해야한다는 것을 알고는, 계셨죠?"

 

벌써 그렇게 됐나. 까마득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우리의 어머니는 폐하께 강요를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의 주인은 당신이기 때문이죠. 원한다면 당신은 그 분 조차 억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폐하가 원하는 상대에게 내려오기로 하셨죠. 마치 당신의 아버지와, 이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혹시 마음에 둔 상대가 있으십니까?"

 

태후의 물음에 왕은 마음이 쑤셨다. 당연히 있다. 마음에 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빼앗긴 상대다. 하지만 이 물음에 답하면 연교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나라의 주인이 아무리 자신이라지만, 태후의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빨리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다져서 연교를 아무런 문제 없이 왕비의 자리에 앉히는 건데...

 

"없으신가 봅니다?"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요."

 

"저의 조카가 아주 참합니다."

 

주름진 미소를 가득 지으며 손을 꼼지락거리는 그녀가 미웠다. 

 

"원하신다면...한번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전하와 정을 나눈 여자도 없으니..."

 

헤실헤실 웃으며 조카에 대한 정보를 가득 흘려주는 그녀의 목소리를 한 귀로 넘기며 왕은 생각했다.

 

'우리 연교가 신녀라...나랑 결혼을 하는 연교...원하는 것은 모든 가질 수 있는 자리...사랑을 가득 받는 자리... 전혀 꿀림이 없군.'

 

그렇게 왕은 중대한 결정을 혼자서 내려버렸다. 

 

 

'소설 > 늑대의 보름달' 카테고리의 다른 글

9. 피어나는 틈  (0) 2019.05.29
8. 서로의 속도 차이  (0) 2019.05.26
6. 우리 할머니  (0) 2019.05.15
5. 이상한 것들  (0) 2019.05.12
4. 또 다시 기절  (0) 2019.05.06